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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32 2019년 04월호 [新명소기행] 십승지十勝地 전북 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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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맑은소리맑은나라 작성일19-04-29 17:53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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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무주군
茂朱郡 은 예로부터 경상·전라·충청 등 삼도 三道 의 접경지대다. 한반도 남부 백두대간의 허리인 이곳 민주지산 자락에 삼도봉이 말해준다. 지금은 경상북도 김천시 및 경상남도 거창군, 서쪽은 전라북도 진안군, 남쪽은 전북 장수군, 북쪽은 충청남도 금산군 및 충청북도 영동군 등 56군과 접하고 있다. 그만큼 우리 국토의 심장 지대란 의미다.

 

무주는 우리나라 십승지十勝地 중의 하나로 유명하다. 정감록의 감결이나 남격암산수십승보길지지에서 말한 십승지는 무주군 무풍면茂豊面이다. 무풍의 중앙을 남대천이 생명수로 흐르고 있다. 십승지지十勝之地 중에 백두대간의 덕유산과 대덕산 지역으로 거론된다. 남격암은, “무주 무풍 북쪽 동굴 옆의 음지이니 덕유산은 난리를 피하지 못할 곳이 없다고 구체적인 장소를 기록하면서도 덕유산 전체를 몸을 보전하는 승지로서 공간적 영역을 확대했다.

 

백두대간의 덕유산과 삼도봉 자락에 둘러싸인 무풍은 고려 시대 이래 대로에서 떨어져 있어 지리적 오지에 있으나 큰 하천을 끼고 산으로 둘러싸인 넓은 분지 지형을 갖추고 있다. 실학자 이중환도 택리지에서 말하기를, “남사고南師古는 무풍을 복지 福地라 하였다. 골 바깥쪽은 온 산에 밭이 기름져서 넉넉하게 사는 마을이 많으니, 이 점은 속리산 이북의 산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고 했다.

그 후 토지 300두락斗落을 부속시킨 다음 쌀 1500[]을 확보한 후 민비에게 상납하고 명례궁明禮宮으로 지었다고 한다.

 

무풍에는 지동마을, 북리마을, 철목마을, 증산리 등 곳곳이 승지다. 12대 명산인 덕유산 자락인 대덕산을 진산으로 삼고 있다. 무풍면은 주변이 산으로 병풍처럼 둘러싸인 천혜의 승지다. 취재진이 직접 둘러본 대덕산은 부드럽고 우직한 남장부의 듬직한 모습 그대로였다.

이 같은 지리적 요충지 무풍을 구한국 조정의 권신 민병석 閔丙奭 (1858~1940)이 주목했다. 민씨 정권 시절 무풍에 명성황후(민비)의 별궁別宮을 조성한 것이다. 무풍면 현내리다. 고종 때의 척신戚臣으로 벼슬이 내부 대신에 올랐던 그는, 한일韓日합방 이후 자작子爵의 작위를 받고 망국 내각의 궁내 대신을 지냈던 인물. 고종 27(1890) 당시 무주부사의 협력을 받아 99칸 규모의 집을 지었다.

 

구한국 어지러운 국제 정세 속에서 유사시 임금이 거동할 수 있는 행궁行宮이 존재할 수 있었지만 이 고을들은 민병석이 국가에 대납한 상납의 댓가로 굶주리고 야반夜半도주를 하기도 했다.

망국의 통감부通監府조정에서 명례궁의 관감을 폐지, 딸렸던 토지마저 일제의 수탈기구 금융조합 소유가 되고, 건물은 이리저리 건물 등을 짓는데 목재로 팔려 갔다.

무주는 무풍과 주계로 두 고을이었으나 조선 태종 14년 옛 무풍과 주계를 합병, 두 고을 이름의 첫 자를 따 무주가 됐다. 무풍은 옛 신라 땅이고, 주계는 백제 땅이다. 무풍은 지금도 전라도 내 경상도 마을로 통한다.

 

청정지역 무주에는 반딧불이 많다. 무주반딧불축제는 함평 나비축제와 예천곤충축제의 모델이 됐다. 무주에는 옛 신라와 백제의 국경 지역이었던 곳에 일제가 낸 바위터널(나제통문)을 비롯해 무주구천동 33경이 한국인들의 유명한 힐링처로 사랑받고 있다. 무주군 설천면 무설로 호롱불마을의 경우 뗏목을 타는 뱃놀이 체험은 여름엔 발디딜 틈이 없다.

 

무주는 고려의 명장 최영 장군의 전설이 서린 적상산이 한동안 국가의 기간 시설인 사고지로 기능했다. 가을에 붉은 여자의 치마처럼 아름다워 붉을 적, 치마 상을 써서 적상산赤裳山(1,034m)이라 불리는 적상산은 국가의 보물인 조선왕조실록을 300년 가까이 안전하게 지켜낸 안국安國의 산이다.

적상산은 한국 5대 비경 중 하나로 꼽히며 사면이 절벽으로 둘러싸여 조선 시대 산성 및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사고로 활용됐다. 사고史庫란 왕이 죽고 만들어진 실록을 보관하는 장소인데 한양을 비롯하여 중요 도시에 보관했다가 임진왜란 후 전주실록 만이 유일하게 남게 되어 산속으로 옮겼다. 무주 적상산 사고는 원래 북한 묘향산에 보관되었던 실록이 북쪽의 위험과 정치적인 이유로 다른 곳을 물색했다. 그만큼 적상산의 산세가 견고했다는 것을 의미한

.

 

병자호란이 끝나고 강화도 마니산 사고가 80% 이상 훼손되자 당시 가장 보존상태가 좋았던 적상산사고에 와서 조선왕조실록을 보충했다. 강화도 마니산에 보관되었던 실록은 바로 전주 사고에 보관됐던 유일한 원본이었으므로 원본을 복원하는데 적상산사고의 공로가 있다. 당시 유생 등 331명이 적상산에 2달가량 머물며 혹한을 견디고 작업을 했다. 일제 강점기에 적상산에 있던 실록은 황실 장서각으로 옮겨졌다가 6.25 때 북한으로 반출됐다. 남북통일이 된다면 묘향산과 적상산은 한국 역사의 정체성의 뿌리로 거듭나지 않을까 싶다.

 

무주 안국사에는 보물로 지정될 가치가 높은 천불전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옛 호국사 자리에 위치한 안국사 선원각은 왕실의 족보와 왕실에 관련된 중요한 것을 보관하는 곳으로 선원보각, 선원전이라 불린다. 인조 때 왕실의 족보를 비롯한 중요한 것을 보관할 만한 가치가 있는 곳으로 인정되어 1641년 사각 옆에다 건립했다. 이로써 선원각과 실록각(사각)이 완전하게 건립돼 무주 적상산사고는 완전한 사고가 됐다. 이후 일제 강점기에는 적상산사고에 있던 책들이 왕실 규장각으로 옮겨졌으며 사고는 폐지됐다.

 

무주의 옛 고을 무풍은 지명 풍 에서 풍요의 고장임을 직감한다. 농경시대에는 곡식의 종자는 생명이나 다름없다. 무풍은 곡식의 종자를 구하는 우리나라 삼풍三豊 중 하나다.

또 하나의 옛 고을 주계朱溪의 붉을 주는 무주읍을 상징하는 색이다. 무주읍을 관통하는 하천이 옛날 적천赤川이고 무주읍을 지키는 산 적상산이 모두 붉다. 무주에는 붉은색을 띄는 산머루와인맛이 일품으로 소문나 있다.

풍요롭고 붉은 땅 무주 고을은 21세기에 각광받고 있는 보배로운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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