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方廣佛華嚴經 卷第三十四 第六會 一品 十地分 十地品 第二十六之一 正宗分 1/3 > 무비스님 화엄경 강설 염화실


MONTHLY

낮은 곳에서 참소리를 담아내는 맑은소리맑은나라 입니다.
무비스님 화엄경 강설 염화실


무비스님 화엄경 강설 염화실

2019. 06 Vol.119 大方廣佛華嚴經 卷第三十四 第六會 一品 十地分 十地品 第二十六之一 正宗分 1/3


페이지 정보

작성자 맑은소리맑은나라 작성일19-06-03 14:24 댓글0건

본문

법회의 시작

대방광불화엄경 강설 62권 점안하고 본강의에 들어가도록 하겠다.

서문

문수보살의 미묘한 지혜는 맑고 밝은 태양이어라.
중생들을 크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미치지 않는 데가 없는 원만한 바퀴가 되어
중생들의 번뇌의 바다를 다 말려 버리시나니
부디 저희들을 살펴 주소서.

문수보살의 미묘한 지혜는 맑고 밝은 달님이어라.
중생들을 크게 인자하게 여기는 마음은
때가 없는 바퀴가 되어
모든 이들을 남김없이 편안하게 하시나니
부디 저희들을 비춰 주소서.

문수보살의 미묘한 지혜는 온 법계를  통솔하는 왕이어라.
법의 보배로 길잡이 삼아 걸림이 없이 허공을 다니시나니
부디 저희들을 가르쳐 주소서.

문수보살은 복도 많고 지혜도 많은 대상(大商)의 주인이어라.
용맹하게 보리를 구하여 뭇 생명을 널리 이익하게 하나니
부디 저희들을 보호하여 주소서.

문수보살은 몸에는 인욕의 갑옷을 입고
손에는 지혜의 칼을 든 뛰어난 장군이어라.
무수한 마군들을 자재하게 항복받으시나니
부디 저희들을 구제하여 주소서.

문수보살은 법이 머무는 수미산 꼭대기어라.
선정의 시녀들이 항상 모시어 미혹의 아수라를 소멸하시나니
제석천 대왕이여, 부디 저희들을 보살펴 주소서.

욕계와 색계와 무색계는 어리석은 범부의 집이요
미혹과 업은 지옥으로 가는 길의 원인이어라.
인자하신 문수보살께서 모두 조복하시나니
캄캄한 밤에 등불이 되어
부디 저희들이 가는 길을 밝게 비춰주소서.

모든 나쁜 길이란 나쁜 길은 다 여의고
모든 착한 길이란 길은 다 깨끗하게 하여
일체 세간을 초월하신 문수보살이시여.
부디 저희들에게 해탈의 문을 보여 주소서.

세상 사람들이 빠져 있는 뒤바뀐 고집인
항상하고 즐겁고 내가 있고 깨끗하다는 생각을
문수보살님은 지혜의 눈으로 모두 능히 떠나셨나니
부디 저희들에게 해탈의 문을 열어 주소서.

삿된 길과 바른 길을 잘 아시고
분별하는 마음 겁이 없으시나니
온갖 것 분명하게 다 아시는 문수보살님이시여,
부디 저희들에게 보리의 길을 보여 주소서.

문수보살님은 부처님의 바른 견해에 머물고
부처님의 공덕 나무를 기르며
부처님의 묘한 법의 꽃비 내리시나니
부디 저희들에게 보리의 길을 보여 주소서.

문수보살님이시여,
과거 미래 현재의 모든 부처님이 곳곳에 모두 다 두루 하여
마치 해가 세상에 뜬 것과 같으시나니
부디 저희들을 위하여 그 길을 말씀하여 주소서.

문수보살님이시여, 중생들의 온갖 업을 잘 아시고
업에 따라 가르치는 모든 수행의 길을 깊이 통달하셨나니
부디 저희들에게 대승의 가르침을 보여 주소서.

2017년 6월 1일
신라화엄종찰 금정산 범어사
如天 無比

 

문수보살에 대한 내용이 이렇게 자세하게 찬탄의 글로 되었다. 입법계품은 선재동자가
구법행각을 하는 내용이다. 선재동자는 맨 처음 문수보살을 만나서 믿음을 확고히 한
다. 믿음이 바탕이 됨으로 해서 그 다음에 십주 십행 십회향 십지 등각 묘각으로 나아
가기 때문이다. 문수보살에 대한 내용이 이렇게 풍부하게 아름답게 잘 표현 되어 있다.
스님들이 법회를 하실 때 이런 것을 찍어서 한 장씩 돌리고 같이 읽고 또 읽고 한 구
절 한 구절 자기 소견을 더해서 설명한다면 그 보다 더 좋은 법회는 없으리라 생각한
다. 어느새 대방광불화엄경 강설 책이62권째 돌아왔고 81권이 돌아가기까지는 1년 반
남았다.
*
오늘 나눠드린 염화실지는 특별한 부분이 있다. 뒤에 56페이지로 넘기면 건당식에 대한
내용을 혜명화보살님이 빠짐없이 잘 기록해서 남기고 있다. 사진도 다 올라와 있어서
보기도 좋고, 건당식이란 과연 무엇인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설명하는 내용도
고대로 인용했다. 건당제자 이름과 법호 심지어 반야심경 외운 것 까지도 다 소개되어
있다. 불전에 화환을 봉정하는 내용 고불문 낭독이 나온다. 고불문이 아주 또 글이 읽
어볼만하다. 법사스님이 등단하고 법호를 부르고 하는 데까지 이번호에 실렸고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서 건당식 내용이 이어질 것이다. 해당되지 않는 분들도 ‘아 건당식이라
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숙지하시면 좋을 것 같다.
*
그리고 오늘도 청량사 법안스님이 선시와 ‘중도가 부처님’ 이런 법문지라고 할까 일지
경(一紙經)을 가져왔다. 나는 일찍이 이런 것을 일지경이라고 불렀는데 그 중에 성철스
님 법문인 ‘중도가 부처님이다’ 하는 글에 조금 주석을 달고 넘어갈까 한다. 
불교에는 무수한 낱말이 있다. 그 중에서도 중도라는 말은 참 중요한 말인데 ‘부처님’
하더라도 거기에 대한 해석이 구구하다. 여기에 모인 대중들도 각자 자기가 알고 있고
들어오고 느끼고 깨달았고 ‘아 부처님은 이런 것이다라고 나는 설명하겠다. 만약에 1분
을 주면 1분짜리 설명은 이렇게 하겠다. 1시간을 준다면 1시간짜리 부처님에 대한 설
명은 이렇게 설명하겠다’ 하는 것들이 것이 다 다르다.
중도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성철스님은 ‘중도가 부처님’ 이렇게 했다.
전에 언젠가 만선동귀중도송이라고 하는 영면연수(永明延壽)선사 만선동귀집(萬善同歸
集) 끝에 중도송(中道頌)이라고 하는 게송을 내가 나눠드린 적이 있다.  내가 그 글을
보며 좋아서 ‘중도는 이렇게 설명되어져야 옳겠다’ 하는 생각을 했다.
여기에 보면 ‘중도가 부처님’ 이라고 했다. 흔히 ‘마음이 부처님이다’ 라고 하는데 그러
면 ‘중도가 마음이다’라고 해도 같은 뜻이 된다. 유형, 무형으로 따질 처지는 아니지만
유형이든 무형이든간에 이 제목은 부처님과 중도를 같은 것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그
안의 내용도 그렇다.
그런데 나는 중도정견이라고 하는 말을 조금 부연 설명해서 중도라고 하는 것은 어떤
사물이나 사건이나 무엇이든지 바로 보는 일종의 견해라고 본다.
중도라고 하는 말은 어떻게 쓰여져야 하는가 한다면 중도적으로 봐야한다는 것이다.
사람도 중도적으로 보고 스님도 중도적으로 보고 일체 것을 전부 중도적으로 봐야 된
다. 그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치우치지 말고 봐야한다. 어떤 편견도 갖지 말고 봐야한
다. 중도라는 말은 그 보는 관점의 한 방법이다.
이것은 성철스님의 설명과는 좀 다르다. 다르기 때문에 내가 말씀드리는 것이다.
‘중도가 부처님이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중도적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부처님도 중도적으로 봐야하고 우리 마음도 중도적으로 봐야하고 남자도 중도적으로 봐
야 하고 여자도 중도적으로 봐야하고 일체 사물을 중도로 봐야한다. 치우치지 말고 봐
야한다.
예를 들어서 분필이 있는데 분필은 칠판에 글씨를 써서 우리에게 지식을 전달하는 도
구다. 그런데 조는 학생에게는 이것을 던져서 잠을 깨우는 무기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
고 분필을 항상 무기로 써서도 안되고 또 항상 글씨 쓰는 데만 쓰여 질 수도 없다.
학생들에게 책걸상은 평소에 공부하는 데 도움을 주는 편리한 도구지만 데모를 할 때
는 불지르는 불쏘시개가 되기도 한다. 자기의 분노를 표출해서 교실이고 학교고 불을
지르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이것은 극단적 표현이긴 하지만 모든 사람 모든 일 모든
사물을 그렇게 중도적으로 봐야 된다는 것이다. 치우치게 볼 수가 없다.
그렇게 치우치지 않고 보는 것이 말하자면 중도적인 견해다. 중도적으로 보는 것이다.
보는 관점의 방법을 말하는 것이 중도라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마음이 중도다’‘부처가 중도다’‘일심이 중도다’‘참마음이 중도다’ 라고 하
는 이런 이야기에 견해를 조금 달리 한다. 물론 참마음도 중도적으로 봐야 되고 부처님
도 중도적으로 봐야 되고 마음도 중도적으로 봐야 된다는 말은 맞다.
예를 들어서 초파일도 다가오고 우리 사찰에서는 부처님께 공양구를 많이 올리는데 영
명연수 선사는 공양구 올리는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 나열환화공구(羅列幻化
供具)라고 중도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 것을 아예 ‘공양구가 중도다’ 라고 하면 말이 안되는 것이다. 공양구 올리는 것도
중도적으로 이해하고 중도적으로 올려야 된다. 이렇게 하면 말이 된다. 공양구를 많이
올려서 꽃도 올리고 쌀도 올리고 밥도 올리고 과일도 올리고 돈도 올리고 무엇이든지
막 올린다. 올리는데 그것은 무엇이냐?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환화, 환영과 같은 것이
고 영상과 같은 것이다.
환화와 같은 공양구지만 그러나 많이 올려야 되고 정성껏 올려야 된다. 환화와 같은 공
양구라면 올릴 게 뭐가 있으며 또 많이 올릴 게 뭐가 있으며 정성이 들어갈 까닭이 뭐
가 있느냐? 라고 반문할 수가 있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중도적인 견해가 아니라는
것이다.
부처님도 환화이고 환영이다. 아니 환영 이전에 목불이고 석불이다. 나무 조각이고 돌
조각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부처님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하게 나무다 돌이다라고만 보는
것은 잘못된 치우친 소견이다. 그렇다고 정말 석가모니 부처님, 역사적인 석가모니 부
처님 같이, 살아있는 부처님으로만 생각한다면 그것도 치우친 소견이다.
불상을 살아있는 부처님 같이 생각한다면 왜 불끄고 문 잠궈 버리고 나가는가. 예불하
고 문 탁 닫고 잠궈버리고 나가버린다. 아니 부처님을 안에 놓고 그렇게 불끄고 나갈
수 있는가?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바로 본 것이다. 중도적으로 본 것이다.
우리가 법당의 부처님을 살아있는 부처님 이상으로 신앙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모실 때
는 모시더라도 불 끄고 잠궈놓고 나갈 때는 또 나가야 되는 것이다.
부처님을 법당 안에 혼자 남겨 놓고 우리는 나가서 우리 볼 일을 봐야 된다. 그렇게 보
는 것이 중도적으로 보는 것이다. 부처님도 그렇지만 나열환화공구(羅列幻化供具)라고
하는 것도 부처님 앞에 올리는 공양구도 환화와 같은 것이다. 환화이고 헛것이다. 그런
줄 알면서 정성껏 시장에 가서 제일 좋고 비싼 과일을 사다가 잔뜩 올리는 것이다. 그
렇게 정성껏 차려서 부처님 자시라고 마음 모아서 기도하고 올리는 것이다. 마음은 그
와 같이 하면서도 또 그것이 환화와 같고 헛것이라고 볼 때는 헛것으로 볼 줄 아는 것
이다. 중도를 이렇게 이해해야 한다. 부처님 앞에 공양 올리는 한 가지 사실만을 가지
고도 우리가 중도적으로 실천해야 한다. 그래서 영명연수(永明延壽)선사가 표현한 중도
송이 중도에 대한 설명을 제대로 했다고 본다.
예를 들어서 건립수월도량(建立水月道場)이라고 하는데 절을 짓는다. 도량을 건립한다
하면서도 그것이 물에 비친 달과 같은 헛것 그림자와 같은 도량임을 알아야 한다.
해인사를 짓든 불국사를 짓든 통도사를 짓든 무얼 짓더라도 그보다 열 배 백 배 더 훌
륭한 도량을 만들더라도 수월도량이라고 생각해야 된다.
우리가 축원할 때 ‘수월도량’이라는 말을 잘 쓴다. 물에 비친 달그림자와 같은 도량이
다. 이렇게 알고 불사를 해야 되고 도량을 건립해야 된다.
그렇다고 물에 비친 달그림자와 같은 허망한 도량이니 아무렇게나 하는 것이 아니고
도량은 도량대로 잘 건립하고 정성껏 건립하되 그러나 이것은 또 수월도량임을 알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중도적으로 우리가 사찰을 건립하고 도량을 건립하는 자세다.
그렇게 중도를 설명해야 제대로 된 설명이라고 나는 본다.
그래서 ‘중도가 부처님이다’‘마음이 중도다’ 이런 것은 ‘미완성 중도설명’이 아닐까 하고
조금 지나친 표현일 수도 있지만 그런 말을 내가 더러 한다. 그렇게 견해가 다르다.
상당히 참고할 만한 내용을 마침 찍어와서 우리가 봄으로써 이런 공부도 한다.
중도라는 말은 무엇을 보든 무엇을 이해하든, 보고 이해하는 데 대한 견해의 문제라고
봐야 옳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이제 본강의에 들어가도록 하겠다.

大方廣佛華嚴經 卷第三十四
第六會 一品 十地分
十地品 第二十六之一
 
正宗分
七. 第一歡喜地


14, 歡喜地의 功果

(1) 調柔果

가, 法

佛子야 菩薩이 住此歡喜地已에 以大願力으로 得見多佛하나니 所謂見多百佛과 多千佛
과 多百千佛과 多億佛과 多百億佛과 多千億佛과 多百千億佛과 多億那由他佛과 多百
億那由他佛과 多千億那由他佛과 多百千億那由他佛이라 悉以大心深心으로 恭敬尊重하
고 承事供養호대 衣服飮食과 臥具醫藥과 一切資生을 悉以奉施하며 亦以供養一切衆僧
하야 以此善根으로 皆悉廻向無上菩提니라 佛子야 此菩薩이 因供養諸佛故로 得成就衆
生法하야 以前二攝으로 攝取衆生하나니 謂布施愛語요 後二攝法은 但以信解力故로 行
일새 未善通達이며 是菩薩이 十波羅蜜中에 檀波羅蜜이 增上하고 餘波羅蜜은 非不修
行이로대 但隨力隨分이니라 是菩薩이 隨所勤修供養諸佛하고 敎化衆生하야 皆以修行
淸淨地法일새 所有善根을 悉以廻向하야 一切智地가 轉轉明淨하며 調柔成就에 隨意堪
用하나니라

“불자여, 보살이 이 환희지에 머물고는 큰 원력으로 많은 부처님을 친견하게 되느니
라. 이른바 여러 백 부처님, 여러 천 부처님, 여러 백천 부처님, 여러 억 부처님, 여
러 백억 부처님, 여러 천억 부처님, 여러 백천억 부처님, 여러 억 나유타 부처님, 여
러 백억 나유타 부처님, 여러 천억 나유타 부처님, 여러 백천억 나유타 부처님을 친
견하느니라.
모든 큰 마음과 깊은 마음으로 공경하고 존중하고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며, 의복과
음식과 와구(臥具)와 의약과 모든 필수품으로 보시하며, 또한 일체 스님들께도 공양
하느니라. 이 선근으로써 위없는 보리(菩提)에 모두 다 회향하느니라.
불자여, 이 보살이 여러 부처님께 공양하였으므로 중생을 성취하는 법을 얻느니라.
앞에 있는 두 가지의 거두어 주는 법으로 중생을 포섭하나니 보시하는 것과 좋은 말
을 하는 것이요, 뒤에 있는 두 가지의 거두어 주는 법은 다만 믿고 아는 힘으로 행하
거니와 아직은 잘 통달하지는 못하느니라. 이것이 보살의 열 가지 바라밀다 중에 보
시바라밀다가 더 많은 것이니라. 나머지 다른 바라밀다는 닦지 않는 것은 아니지마는
힘을 따르고 그 분한을 따를 뿐이니라.
이 보살이 곳을 따라서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고 중생을 교화하는 일을 부지런히 닦
아서 청정한 지위의 법을 모두 다 수행하고, 그러한 선근으로 회향하여 일체 지혜의
지위가 더욱 더 밝고 깨끗하여지며, 조화롭고 유연한 공과가 성취되어[調柔果]가 성
취되어 마음대로 능히 활용하느니라.”   

*
환희지(歡喜地)의 공과(功果)
*
조유과(調柔果) : 조화롭고 유연한 공과
*
395쪽(화엄경 제2권 민족사刊) 할 차례다. 환희지에 대해서 법문을 쭉 하고 있는데 그
러한 환희지를 우리가 수용하고 거기에 머물렀을 때 그에 대한 공과는 어떤가 하는 것
을 말하는 대목이다.
어떤 수행을 했든지 간에 어느 한 단계에 올랐을 때 그 사람이 어떠해야 되는가.
제1환희지에 대한 공과가 몇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조유과다. 고를 조(調)자 아주 조화
로울 조하고 부드러울 유(柔)자다. 조화롭고 부드러운 유연한 공과다.
사람이 유연해야 되고 부드러워야 되고 누구하고도 융화도 잘 돼야 한다. 말하자면 아
집, 아견을 버리고 조화롭게 살 줄 아는 상태가 되는 것이 환희지에 머물렀을 때의 첫
번째 공과다.
우리가 행자생활을 마치고 사미계를 받고 스님이 딱 되면 그야말로 무궁화를 달고 있
다가 별을 단 것과 같다. 절에서 행자와 사미에 대한 대접이 천지차이다.
예를 들어서 어떤 청년이 신도로 와서 절에서 이러고 저러고 하면 그 청년을 신도로
잘 대접해 준다. 그런데 청년이 출가해서 행자가 되겠다고 하면 그날부터는 ‘야 행자실
에 가’하면서 행자실에 가서는 스님이 시키는 대로 해야되고 나무도 해 와야 되고 밥도
지어야 되고 청소도 해야 된다.
그런데 신도로서의 청년은 함부로 그렇게 시키지 못한다. 그런 점들이 차이가 난다.
마찬가지로 환희지에 머물렀을 때 어떤 결과가 우리에게 있는가? 정상적인 수행을 한
보살에게는 이런 조화롭고 유연한 공과가 따르게 되어 있다. 그렇게 돼야 한다는 의미
도 된다.
불교를 처음 만나서 제대로 불법이 가슴에 와 닿았을 때 얼마나 기쁜가. 아주 환희롭
다. 우리가 절에 처음 와서는 뭐든지 좋다. 어떤 어려운 일을 시켜도 다 즐겁게 다 받
아들이고 낱낱이 신기할 뿐이다. 그런 어떤 마음 자세가 불법을 만났을 때의 환희심일
것이다. 여기 법이 있고 비유가 있고 합이 있고 법과 비유를 합해서 또 설명하는 식으
로 제대로 체계를 잡아서 글이 펼쳐진다.
*
법(法) : 법을 밝히다
*
처음에는 법이다.
*
불자(佛子)야 : 불자야
보살(菩薩)이 : 보살이
주차환희지이(住此歡喜地已)에 : 이 환희지에 머물고 나서 
이대원력(以大願力)으로 : 큰 원력으로써
득견다불(得見多佛)하나니 : 많은 부처님을 친견하게 된다.
소위견다백불(所謂見多百佛)과 : 소위 아주 많고 많은 백 부처님
다천불(多千佛)과 : 다천불
다백천불(多百千佛)과 : 다백천불
다억불(多億佛)과 : 다억불
다백억불(多百億佛)과 : 다백억불
다천억불(多千億佛)과 : 다천억불
다백천억불(多百千億佛)과 : 다백천억불
다억나유타불(多億那由他佛)과 : 다 억 나유타불과
다백억나유타불(多百億那由他佛)과 : 다 백억 나유타불과
다천억나유타불(多千億那由他佛)과 : 다 천억 나유타불과
다백천억나유타불(多百千億那由他佛)이라 : 다 백천억 나유타불 이렇게 많고 많은 부처
님을 친견하게 된다. 차츰차츰 숫자가 많아지고 있다.
예를 들어서 역사적인 석가모니 부처님을 부처님으로 알다가 또 그 후에 깨달은 모든
보살들을 부처님으로 알다가 또 조사스님들까지도 깨달은 분은 부처님으로 안다. 불교
역사가 2600년이 되었으니 그런 것을 계산한다 하더라도 깨달은 부처님이 엄청나게 많
을 것이다.
또 화엄경에 오니까 모든 사람, 모든 생명은 전부 부처님이다. 그러면 현존하는 이 지
구상의 70억 인구만 부처님이 아니라 과거에 이 땅에 왔다 가신 분들도 모두 부처님이
고 앞으로 올 모든 사람 모든 생명도 다 부처님이다. 화엄경에서는 이렇게 보인다는 것
이다. 점차적으로 그렇게 안목이 넓어져 가니까 모든 사람이 부처님으로 보여지는 상황
을 그려놓은 내용이다.
큰절에 와서 행자노릇을 하면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
내가 처음에 범어사에 왔을 때는 그 스님이 그 스님 같아서 지나가는 스님에게 계속
절을 했다. ‘저스님 봤더라 안봤더라’ 하고 분별할 필요도 없다. 분별해도 본 스님인지
안 본 스님인지 분별도 안되고 모른다. 덮어놓고 절을 하니까 만사형통이다. ‘저놈은
행자가 되어가지고 선배스님 보고 절도 안한다’는 말보다는 ‘저 행자는 아까 절하더니
또 절한다’라고 하는 것이 차라리 낫다. 나는 무조건 보이는 스님들에게 절을 했는데
그편이 훨씬 쉬웠다. 처음 절에 오면 기왓장도 좋고 기와집도 좋고 일체가 다 신기하기
이를 데가 없다. 그런 마음 상태를 이렇게 그려놨다고 봐도 좋다.
*
실이대심심심(悉以大心深心)으로  : 큰마음과 깊은 마음으로
공경존중(恭敬尊重)하고 : 공경 존중한다. 여러 스님들이 들뜬 마음으로 절에 처음 왔을
때의 신기한 어떤 감정, 환희로운 감정 그걸 상기하면 아마 이해가 갈 것이다.
승사공양(承事供養)호대 :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되
의복음식(衣服飮食)과 : 의복과 음식과
와구의약(臥具醫藥)과 : 와구와 의약과
일체자생(一切資生)을 : 일체 모든 생활도구들을 
실이봉시(悉以奉施)하며: 다 다 받들어 베풀며
역이공양일체중승(亦以供養一切衆僧)하야 : 또한 일체의 여러 대중 스님들을 공양해서
이차선근(以此善根)으로 : 이러한 선근으로써
개실회향무상보리(皆悉廻向無上菩提)니라 : 다 다 무상보리에 회향하느니라. 최고의 깨
달음의 경지를 향해서 나아간다.
*
불자(佛子)야 : 불자야
차보살(此菩薩)이 : 이 보살이
인공양제불고(因供養諸佛故)로 : 모든 부처님께 공양함을 인한 까닭에
득성취중생법(得成就衆生法)하야 : 중생을 성취하는 법을 얻어서 중생을 성숙시키고 중
생을 교화시킨다. 성취라는 말, 성숙이라는 말 속에는 다 그런 의미가 있다.
이전이섭(以前二攝)으로 : 전이섭은 사섭법 중에 보시 애어를 말한다. 보시 애어 두가지
섭으로써 
섭취중생(攝取衆生)하나니 : 중생을 섭취하나니 보시하고 애어 사랑스러운 말 뭐든지
다 베풀고 그리고 사랑스러운 말로 대하고 하나니
위보시애어(謂布施愛語)요 :  위보시와 애어다.
후이섭법(後二攝法)은 : 또 후이섭법으로써, 사섭법은 보시(布施) 애어(愛語) 이행(利行)
동사(同事)다. 이익은 이익이라고도 하고 같은 뜻인데 뒤에 나오는 이행섭 동사섭 이법
으로써
단이신해력고(但以信解力故)로 : 믿음과 이해의 힘을 쓰는 까닭에 
행(行)일새 : 그 두 가지 이행과 동사로써 행할새
미선통달(未善通達)이며 : 그것이 확실하게 자기 것이 되지 못했다. 아직은 잘 통달하지
는 못했으며
시보살(是菩薩)이 : 시보살이
십바라밀중(十波羅蜜中)에 : 십바라밀 중에는 초지에서는 그렇다는 뜻이다. 초지에서 말
하자면 보시 애어는 됐는데 이행 동사는 아직도 완전하지 못하다. 미선통달이 그말이
다. 보살이 또 십바라밀 중에서
단바라밀(檀波羅蜜)이 : 단바라밀이  
증상(增上)하고 : 증상한다. 보시 바라밀은 아주 완전히 자기 삶이 되었다.
여바라밀(餘波羅蜜)은 : 그리고 나머지 바라밀은
비불수행(非不修行)이로대 : 수행하지 아니하는 것은 아니로되 보시 잘 한다고 해서 무
슨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를 안하는 것은 아니지만
단수력수분(但隨力隨分)이니라 : 다만 힘을 따르고 그 분을 따름이니라.
*
시보살(是菩薩)이 : 이것이 보살이
수소근수공양제불(隨所勤修供養諸佛)하고 : 부지런히 닦는 바를 따라서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고
교화중생(敎化衆生)하야 : 중생을 교화해서 
개이수행청정지법(皆以修行淸淨地法)일새 : 다 청정한 지위, 환희지다. 환희지의 법을
수행할새
소유선근(所有善根)을: 거기서 나오는 모든 선근들을 
실이회향(悉以廻向)하야 : 다다 회향해서
일체지지(一切智地)가 : 일체 지혜의 지위가 
전전명정(轉轉明淨)하며 : 더욱 더욱 밝아진다. 지혜가 차츰 차츰 더 밝아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날이 아주 맑은 날 일초일초 시간을 잘라서 보면 해가 뜨는 현상을 우리
가 느낄 수 있다. 주변이 조금 밝아지다가 더 밝아지고 더더욱 밝아진다. 전전명정이
다. 그러다가 아주 잠깐 시간 지나가는 것을 놓쳐버리고 딴 생각을 하면 어느새 훤해져
있다. 
조유성취(調柔成就)에 : 조화롭고 유연한 마음작용이 마음 씀씀이가 성취됨에 
수의감용(隨意堪用)하나니라: 마음대로 능히 활용한다. 환희지에 머물렀을 때 이런 효
과, 공과가 나타난다.

나, 喩

佛子야 譬如金師가 善巧鍊金하야 數數入火에 轉轉明淨하며 調柔成就에 隨意堪用인달
하니라

“불자여, 비유하면 마치 금(金)을 다루는 사람이 금을 단련할 적에 자주자주 불에
넣으면 점점 더 밝고 깨끗하여지고 조화롭고 유연한 공과가 성취되어 마음대로 능히
사용하는 것과 같으니라.”
 
*
유(喩) ; 법을 비유하다
*
비유를 잘해 놨다.
*
불자(佛子)야 : 불자야
비여금사(譬如金師)가 : 금을 단련하는 사람이
선교연금(善巧鍊金)하야 : 아주 기술적으로 금을 단련해서
삭삭입화(數數入火)에 : 자주자주 불에 넣었다가 꺼내고, 요즘 금을 제련하는 것 하고
어떤 차이가 있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그러한 과정은 다 거치게 된다.
전전명정(轉轉明淨)하며 : 전전명정이다. 깨끗한 금으로 명정하게 하며
조유성취(調柔成就)에 :부드러워 진다. 깨물면 이빨이 쑥 들어갈 정도로 부드러워 진다.
부드러워짐이 성취됨에 
수의감용(隨意堪用)인달하니라 : 뜻을 따라서 내 마음대로 능히 활용하게 된다.
스님들이 한 일년쯤 행자생활을 고되게 잘하고 나면 어지간한 세속의 때가 다 빠진다.
특히 옛날에는 십대에 출가를 하기 때문에 세속의 때도 크게 묻지 않고 조금 묻었다
해도 한 일년간 독한 스승 밑에서 제대로 단련을 받고 나면 그 때가 싹 벗어진다. 그런
데 세속에서 20대까지 살았다고 하면 그만치 때가 많이 묻어서 그 세속 때를 벗으려면
엄청 힘이 든다. 불에 여러 번 들어갔다 놔왔다 해야 된다. 여러 번 들락날락 하더라도
그렇게 해서 세속적인 때가 다 벗겨진다면 그래도 큰 다행이다. 그렇게 어려운 것이다.
사찰에서 올깎이 늦깎이라는 말이 유행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또 ‘쌈지가 덜렁덜렁 한다’는 표현도 있다. 옛날 사람들은 쌈지에 담배뿐만 아니라 다
른 중요한 것들도 넣고 허리춤에 차고 다녔다. 그게 편리하니까 절에 와서도 쌈지에 자
기 열쇠 같은 것을 넣고 차고 다니는데 중노릇 오래 한 사람은 쌈지를 차고 다니지 않
는다. 따로 관리하는 방법이 다 있다. 그런데 세속 사람들은 사용해 본 것이 있어서 쌈
지가 더 편하다. 그래서 쌈지가 덜렁덜렁 한다는 표현을 쓴다.
요즘 사찰에서 방편으로 무슨 조건을 받아서 정년퇴직한 사람들의 출가를 받아준다고
한다. 교육원에서나 총무원에서 그런 문제를 가지고 토론 할 때 보면 업(業) 이야기를
하면서 속가의 물이 크게 들지 않는 어린 사람도 제대로 안되는데 나이 40. 50 된 사
람을 받아서 어떻게 감당하려고 하느냐는 말들을 한다. 행자교육을 시켜본 스님들은 아
마 절실히 그런 것을 느낄 것이다. ‘마치 금을 단련하는 것과 같이’ 라고 비유를 참 잘
들었다.
 
다, 合

菩薩도 亦復如是하야 供養諸佛하고 敎化衆生이 皆爲修行淸淨地法일새 所有善根을 悉
以廻向하야 一切智地가 轉轉明淨하며 調柔成就에 隨意堪用이니라

“보살도 또한 다시 이와 같아서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고 중생을 교화함이 모두 청
정한 지위의 법을 수행함이요, 그러한 선근으로 모두 다 회향하여 일체 지혜의 지위
가 점점 더 밝고 깨끗하여지고 조화롭고 유연한 결과가 성취되어 마음대로 활용하느
니라.”

*
합(合) : 법과 비유를 합하여 밝히다
*
위의 것과 글이 크게 다르지 않다. 법과 비유를 합해서 이야기 한다.
*
보살(菩薩)도 : 보살도
역부여시(亦復如是)하야 : 역부여시하야 
공양제불(供養諸佛)하고 : 제불에게 공양하고 
교화중생(敎化衆生)이 :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
개위수행청정지법(皆爲修行淸淨地法)일새 : 다 청정 지위의 법을 수행하는 것이 될새
이것이 결국은 초지인 환희지다.
소유선근(所有善根)을 : 모두다 선근을
실이회향(悉以廻向)하야 : 전부 회향해서
일체지지지(一切智地)가 : 일체 지혜의 지위가 
전전명정(轉轉明淨)하며 : 차츰차츰 더욱더 수행할수록 밝고 깨끗해지며
조유성취(調柔成就)에 : 부드러움이 성취됨에
수의감용(隨意堪用)이니라 : 뜻을 따라서 능히 활용하게 된다. 사용하게 된다.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대로 22 동방빌딩 4층 301호 Tel. 051-255-0263, 051-244-0263 Fax. 051-255-0953 E-mail. puremind-ms@hanmail.net
COPYRIGHT ⓒ 맑은소리맑은나라. ALL RIGHTS RESERVED.